서 론
생명의 전달
1. 인간 생명(Humanae vitae)을 전달할 중대한 임무는 부부를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자유롭고 의식적인 협조자로 들어높이는 것이므로, 때로는 적지 않은 어려움과 걱정이 따르기는 하지만, 부부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이 임무 수행은 언제나 부부의 양심에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켜왔지만, 최근 인간 사회의 발전은 많은 변혁을 가져왔고 더욱 새로운 문제들을 일으켜놓았다. 이 문제들은 사람들의 생명과 행복에 직접 관계되는 일들이므로 교회가 무관심할 수는 없다.
Ⅰ. 문제의 신국면과 교회의 교도권
문제의 신국면(新局面)
2. 과연 목전의 변혁은 중대하고도 복잡하다. 첫째로 인구의 급격한 증가를 들 수 있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재원보다 인구가 더 빨리 증가함으로써 많은 가정과 개발 도상의 많은 민족들이 더 많은 불편에 신음하게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한다. 여기서 국가 권력들은 근본적으로 이런 위험을 제거해 보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과 주거의 조건을 비롯하여 경제 분야와 교육 분야에 있어서 증대된 요청들은 오늘날 더 많은 수의 자녀들을 합당히 길러내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또한 인간 사회 안에서 여성의 인격과 위치, 결혼에 있어서 부부애의 가치, 이 부부애에 관련된 부부 행위 등에 대한 견해가 어느 정도 바뀌었다고도 말하고 있다.
끝으로 무엇보다도 특기해야 할 것은 사람이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데에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였고, 인간 생활 전체에 걸쳐 이 지배권을 행사하려 하며, 인간의 육체와 심리 생활과 사회 생활과 생명 전달을 규제하는 법칙에까지 이 지배권을 행사하려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문제
3. 여기서 새로운 문제들이 야기된다. 현재의 생활 조건으로 보거나 부부의 화목과 신의를 보존하기 위한 부부 관계의 의의를 인정한다면, 큰 희생 때로는 영웅적 희생 없이는 지킬 수 없는 현재의 도덕률을 재검토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는 이른바 “전체성의 원리”를 이 분야에 적용한다면, 임신율을 합리적으로 감소시키려는 목적으로 물리적 불임을 가져오는 행동으로써 지혜롭게 산아 조절을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즉 자녀 출산의 목적성은 개별적인 부부 행위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부부 생활 전체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날로 더욱 강하게 의무감을 느끼느니 만큼, 생명 전달의 임무를 생리적인 주기에 맡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과 의지에 맡겨야 할 시기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다.
교도권
4. 이런 문제들은 분명 교회의 교도권으로 하여금 혼인에 관한 윤리 원칙을 새롭게 더욱 깊이 연구하게 하였다.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계시로써 밝혀지고 그로 인해 풍부하게 된 자연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연법의 해석이 교회의 교도권에 속한다는 것을 부정할 신자는 아무도 있을 수 없다. 선임 교황들이 가끔 주장한 바와 같이,1)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그 밖의 사도들을 당신 권한에 참여케 하시며, 만백성에게 당신 계명을 가르치도록 파견하실 때에,2) 그들을 모든 도덕법의 수호자요 해석자로 삼으셨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복음법의 수호자만이 아니라 자연법의 수호자로 삼으신 것이다. 자연법도 하느님의 뜻을 밝혀주고 있으므로 자연법의 준수도 사람들이 구원되기에 필요한 것이다.3)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는 교회는 언제나 그러하였지만 특히 최근에 와서 혼인의 본질과 부부의 올바른 권리 행사와 부부의 의무 등에 관한 적절한 문서들을 풍부히 남겨놓았다.4)
특수한 연구
5. 이런 직무상의 책임감 때문에 나도 선임 교황 요한 23세가 1963년 3월에 설립한 “연구위원회”를 인정하고 확대하였던 것이며, 거기에는 이 문제의 여러 전문가들뿐 아니라 결혼한 부부들까지도 참여케 하였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부부 생활과 특히 산아 제한에 관한 의견을 수집하는 것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다른 세상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 기대에 교회의 교도권이 적절한 해답을 줄 수 있도록, 수집한 내용을 교회에 제공하는 것이었다.5)
이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받아보고, 주교직에 있는 형제들의 자발적인 의견 제출을 받고 또는 그들의 의견을 물어본 후에 이 복잡한 내용의 모든 부분을 세밀히 검토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교도권의 해답
6. 그러나 위원회에서 보게 된 결론들은 확실한 결정적 판단도 못되었고 이렇게 중대한 문제를 내 스스로 검토해야 할 의무를 면제해 줄 만한 것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위원회 안에서 윤리 원칙 설명의 의견 통일을 보지 못하였고 더구나 문제 해결의 방법이 교회의 교도권으로 항구히 가르쳐오던 혼인의 도덕률에서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게 보고된 문서들을 마음을 다해서 세밀히 검토하고 오랫동안 하느님께 기도한 후에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명령을 따라 이제 이 어려운 문제에 해답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Ⅱ. 교리상의 원칙
전체적 인간관
7. 자녀 출산에 관한 문제는 다른 인생 문제와 마찬가지로, 생리학적, 심리학적, 인구학적, 사회학적 이유와 같은 어떤 특수한 이유를 초월해서 인간 전체와 인간이 맡은 임무 전체를 감안해서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임무는 자연적이며 현세적인 것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이며 영원한 것에도 관계되는 것이다. 자녀의 수를 제한하는 인공적인 방법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부부애와 책임감을 느끼는 부성의 요구라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먼저 부부 생활의 이 두 가지 요소를 명백히 규정하고 밝혀주어야 하겠다. 최근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기쁨과 희망”이란 말마디로 시작한 ?A사목 헌장?B을 발표하면서 이 점에 관하여 최고 권위로써 설명한 내용을 따라 그 두 가지 요소를 밝히려 한다.
부부애
8. 부부애는 최고 원천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비로소 부부애의 참 본질과 참 품위가 드러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6)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7)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혼인은 우연이나 자연력의 맹목적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의 계획을 인간들 사이에서 실현시키시기 위하여 지혜롭게 제정하신 것이다. 부부는 그들 자신을 근본적으로 또 독점적으로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서로 자기를 완성하려는 인격의 교류를 이루며 새로운 생명의 창조와 교육을 위하여 하느님과 협조하는 것이다.
성세성사를 받은 사람들의 혼인은 은총의 성사적 표지인 것이니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부부애의 특성
9. 이런 빛 속에서 보면 부부애의 고유한 특성과 필요성이 더욱 명백해진다. 이것을 정당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다.
첫째로 부부애는 완전히 인간적 사랑이다. 즉 감각적이며 영신적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본능이나 감정의 충동이 아니고 또한 특히 자유 의지의 행위이며 따라서 일상 생활의 기쁨과 고통 중에 항구히 지속될 뿐 아니라 오히려 증가되는 것이다. 부부는 마치 하나의 마음, 하나의 영혼같이 되어 인간적 완성을 함께 얻을 만한 것이어야 한다.
다음은 전체적인 사랑이다. 즉 부부애는 인격적 사랑의 특수형으로서 그로써 부부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가진다. 불의한 예외도 허용치 않을 뿐더러 자기만의 편리도 찾지 않는다. 자기 배우자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게서 받은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배우자 자신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며, 자신을 그에게 줌으로써 그를 풍요케 할 수 있음을 기뻐한다.
또한 부부애는 죽기까지 충실하고 독점적이다. 신랑 신부는 자유로운 몸으로서 의식적으로 혼인의 인연을 맺는 그날, 이미 그런 각오가 서 있다. 부부의 이런 신의는 때때로 어려움이 따르기도 하겠지만 언제나 가능하고 또 언제나 고상하고 공로 풍부하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세기를 통하여 많은 부부가 보여준 모범은 이런 신의가 혼인의 본질에 따르는 것이며 거기서 깊고 지속적인 행복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끝으로 이 사랑은 결실 풍부한 것이다. 부부의 교류로써 이 사랑은 만족하지 않고 더 계속되며 새 생명을 불러일으킨다. “혼인과 부부애는 그 성격상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한다. 과연 자녀들은 혼인의 가장 뛰어난 선물이며 부모의 행복을 위해서 크게 이바지한다.”8)
부모의 책임
10. 그러므로 부부애는 책임 있는 부모의 사명을 부부에게 요구한다. 부모의 책임이 오늘날 대단히 강조되느니 만큼 올바로 이해되어야 하겠다. 부모의 책임은 정당한 여러 가지 입장들을 서로 연결시켜서 검토하여야 한다.
먼저 생물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부모의 책임감은 부모의 역할을 인식하고 존중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이성(理性)은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에 있어서 인격에 속하는 생리적 법칙을 발견한다.9)
다음에는 본능과 감정의 충동과 관련해서 생각한다면, 부모의 책임이란 필요한 지배를 뜻하는 것이며, 본능과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지성과 의지인 것이다.
또 물리적,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과 관련해서 생각한다면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은 심사숙고한 후에 너그러운 마음씨로 더 많은 자녀를 두기로 결정하든지 또는 중대한 이유가 있어서 윤리 원칙을 지키면서 일정한 기간이나 불확정 기간 동안 다른 자녀를 두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부모의 책임은 특히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객관적 윤리 질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질서의 믿을 만한 해석자는 각자의 올바른 양심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책임 수행은 올바른 가치 질서 안에서 하느님과 자신들과 가족들과 인간 사회에 대한 부부의 의무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생명 전달의 임무 수행에 있어서 부부가 정당한 방법이라고 해서 완전히 제멋대로 독자적으로 자유로이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창조 계획에 순응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 계획은 혼인과 부부 행위의 본질로써 표현되어 있고 또 교회의 가르침이 끊임없이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10)
부부 행위의 본질과 목적의 존엄성
11. 부부가 밀접히 정결하게 결합되어 인간 생명이 전달되는 부부 행위는 공의회에서 말한 대로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11) “부부 행위는 비록 부부가 뜻하지 않은 이유 때문에 임신이 안될 것을 미리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부부의 결합을 표시하고 견고케 하는 목적을 내포하는 것이므로 언제나 정당한 것이다. 사실 경험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부부 행위가 이루어질 때마다 새 생명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연의 법칙과 임신의 시기를 지혜롭게 마련하셨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음 출산까지의 일정한 간격이 생기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교회는 자연법을 해석하며 변함없이 자연법을 지키도록 사람들을 권고하여, 어떠한 부부 행위든지 인간 생명을 출산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12)고 가르치는 바이다.
일치와 출산의 관계
12. 교회의 교도권이 가끔 설명해 온 이런 교리는 일치의 의의와 출산의 의의를 결부시키는 불가분의 연관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두 가지 의의는 모두 부부 행위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므로 인간이 고의로 이것을 파괴할 수는 없다.
사실 이같이 밀접한 관계 때문에 부부 행위는 남편과 아내를 굳은 인연으로 결합시키는 동시에 부부에게 다 같이 본질적으로 주어진 자연의 법칙을 따라 새 생명을 낳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일치와 출산이라는 이 두 가지 면을 준수한다면 부부 행위는 전적으로 참된 부부애의 의의와 인간에게 맡겨진 가장 고귀한 사명인 어버이에로의 질서를 유지할 것이다. 이런 교리가 얼마나 인간다운 것인지는 현대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바이다.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신뢰
13. 사실 배우자의 조건이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한 부부 행위는 참된 사랑의 행위가 될 수도 없고 따라서 부부 관계의 바른 질서가 요구하는 내용에 위배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깊이 생각해 본다면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특별법으로 부여하신 생명 전달의 능력을 방해하는 부부애의 행동은 혼인을 제정하신 하느님의 계획에도 위배되고, 시초에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도 위배되는 행동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의 선물을 사용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그 선물의 의의와 목적을 파괴한다면 남편과 아내의 본성에 위반되고 부부의 밀접한 관계에도 위배될 뿐 아니라 또한 하느님의 계획과 그 거룩한 뜻에 항거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산아의 법칙을 지키며 부부애의 선물을 누리는 사람은 자신이 생명의 원천의 주인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계획을 실천하는 봉사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기 몸에 대한 한정없는 권한을 가지지 못한 것처럼 생식 기능 자체에 대해서도 특별한 이유로써 더욱 그러하다. 생식 기능은 본질적으로 인간 생명의 출산을 목적하는 것이며 인간 생명의 원천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요한 23세가 권고한 대로 “인간의 생명은 누구나 신성시해야 한다. 생명은 그 형성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작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13)
산아 조절의 그릇된 방법
14.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간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이론의 기초적 원칙에 의거하여 다시 주장하는 바는, 직접적인 임신 중절을 산아 조절의 정당한 방법이라고 하는 의견을 전적으로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직접적 낙태는 비록 치료의 이유라 할지라도 배격해야 한다.14)
마찬가지로 교회의 교도권이 여러 번 가르친 대로, 남자이건 여자이건 영구적이건 일시적이건 직접 단종(斷種)시키는 것은15) 단죄해야 한다.
또한 부부 행위에 선행하거나 동반하거나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피임을 목적하거나 방법을 강구하는 모든 행위를 배격해야 한다.16)
또는 고의로 피임하는 부부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덜 크다고 생각되는 악을 택해야 한다든지, 부부 행위는 피임할 때의 행위도 그 전후에 임신할 때의 행위와 함께 하나의 행위를 형성하는 것이므로 이 모든 행위가 같은 하나의 윤리적 선에 참여한다는 따위의 이유를 끌어대는 것은 타당치 않다. 물론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해서나 탁월한 선을 촉구하기 위하여 덜 큰 악을 묵인할 수 있는 것17)은 사실이나, 아무리 중대한 이유가 있다 하여도 악을 행함으로써 선을 결과하도록 해서는 안된다.18) 즉 본질적으로 윤리 질서를 파괴하는 인간답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되는 행위는 비록 개인이나 가정이나 인간 사회의 선을 옹호하고 촉진할 목적을 가졌다 할지라도, 의지의 적극적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고의로 임신을 불능케 함으로써 내적으로 이미 악하게 된 부부 행위도 임신할 수 있는 부부 생활 전체와 함께 선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그릇된 생각이다.
치료 방법의 타당성
15. 교회는 육신의 병을 고치는 데에 필요한 치료 방법을 부당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비록 그로 말미암아 출산 장애가 초래되더라도 또 그것을 미리 알았더라도 이런 장애를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직접 목적하지만 않았다면19) 언제나 타당한 것이다.
주기법(週期法) 이용의 타당성
16. 위에서(3항) 말한 바와 같이 부부 생활에 관한 교회의 이 같은 교리에 반대하여 현대 사람들은 비이성적 자연이 부여한 힘을 조정하여 인간의 이익을 도모하도록 지배하는 것은 인간 이성의 권리이며 사명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문제에 있어서도 산아를 인공적으로 조정함으로써 가정의 평화와 화목에 이바지하고 이미 출생한 자녀들 교육에 더욱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 수 있을진대 현대 환경을 보아 산아 제한이 오히려 합리적이 아닌가 한다. 이 물음에 명확한 해답을 주어야 하겠다. 이성을 갖춘 인간이 창조주와 긴밀히 협력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 이성의 작용을 교회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찬양하고 권장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사물의 질서를 지킨다는 조건하에서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육체적 또는 심리적 이유이건, 또는 외적 환경의 이유이건, 다음 출산과 사이에 간격을 두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부부는 생식 능력에 내재하는 자연 주기를 이용하여 불임기에만 부부 행위를 함으로써 방금 설명한 도덕률을 거스르는 일이 없이20) 산아를 조절하는 것은 괜찮다고 교회는 가르치는 바이다.
교회는 부부가 불임기를 이용해도 좋다고 판단하는 동시에 임신을 직접 방해하는 방법의 사용은 아무리 정당하고 심각하게 여겨지는 이유를 제시한다 하여도 언제나 부당하다고 배척하면서 교회는 그 가르침에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 두 가지 경우는 서로 본질적으로 다르다. 첫째 경우에는 부부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이고, 둘째 경우에는 부부가 출산의 자연 질서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다. 두 경우 다 마찬가지로 그럴듯한 이유로 부부가 임신을 피하자는 데에 확실히 동의하고 자녀가 태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첫째 경우에 있어서만 부부가 정당한 이유로 자녀의 출생을 원할 수 없을 때마다 임신기에 부부 행위를 절제하고 불임기에는 부부애를 증거하며 약속한 신의를 지키기 위하여 부부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부는 참되고 완전한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산아 조절의 인공적 방법의 중대한 결과
17. 인공적 산아 제한 방법의 결과를 생각한다면 착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이런 행동으로써 얼마나 넓게 또 얼마나 쉽게 부부의 불신과 윤리 생활의 퇴폐의 길이 열리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인간의 나약함을 알고 또 사람들이, 특히 정욕이 강한 젊은이들이 도덕률을 충실히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큰 자극이 필요하며 그들에게 너무 쉬운 범법의 방법을 제공해서는 안되겠다는 사실들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리 오랜 경험이 필요 없다. 더욱 통탄할 일은, 피임 방법 사용에 습관된 남편들이 아내를 존경할 줄 모르며, 아내의 몸과 마음의 균형을 무시하고 아내를 자기 정욕에 봉사하는 도구로 삼아버려, 아내를 존경과 사랑으로 대해야 할 동료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마침내 이런 방법으로써 자연법에 관심 없는 국가 지도자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권리를 부여하게 되는가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가정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부부가 타당하다고 인정하는 방법을 국가의 최고 지도자들이 국가 전체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사용한다고 해서 그들을 책망할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국가 권력이 더욱 효과적인 임신 저지 방법을 권장하거나 더구나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그런 방법의 사용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한다 해도 누가 감히 그것을 저지시킬 수 있겠느냐? 하느님의 법이 내포하고 있는 어려움을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 공동체가 체험한다고 해서 그 어려움을 피하려고 할 때에 사람들은 부부의 가장 고유한 사명의 심장부에까지 국가 권력의 방자한 간섭을 허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산아의 의무를 인간 자의(恣意)에 맡길 수 없을진대 필연적으로 인간이 그 육체와 그 자연적 염두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권한에, 넘어서는 안될 어떤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이런 한계는 개인도 국가 권력도 넘어서는 안될 한계인 것이다. 이런 한계를 정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 원칙에 따라 인간의 육체 전체와 그 자연적 임무에 바쳐야 할 존경과 선임 교황 비오 12세가 밝힌,21) 소위 “전체성의 원리”의 올바른 이해 때문인 것이다.
참된 인간 가치의 보증인인 교회
18. 모든 사람이 이런 교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여론이 너무 많고 또 그것이 홍보 수단을 통해서 매우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그 하느님이신 창립자와 마찬가지로 “반대를 받는 표적”22)이 되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법과 복음법의 구별 없이 모든 법을 겸손되이 또 강하게 가르쳐야 할 맡은 바 의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이 두 가지 법의 입법자도 아니고 따라서 이 법의 구속을 받지 않을 수도 없으며, 오직 이 법의 수호자요 해석자에 불과하므로 실제로 부당한 것을 절대로 타당하다고 선언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선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부부의 도덕률을 완전히 보존함으로써 인간 문화 재건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과학 기술에 자신을 맡겨 본연의 임무를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교회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바이다. 그래야만 부부의 품위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구세주의 모범과 가르치심을 따라 진실하고 관대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며 그들을 이미 이 세상 나그네길에 있어서부터 “하느님의 자녀로서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23) 도와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Ⅲ. 사목 지침
어머니요 스승인 교회
19. 만일 내가 혼인에 관한 하느님의 법을 지키며 존중하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한 후에, 오늘날 가정과 민족이 당하고 있는 어려운 생활 조건 중에서 자녀의 수를 정당하게 조절하는 데에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없다면 내 말은 인류의 어머니며 스승인 교회의 생각과 걱정을 표현했다고는 볼 수 없다. 사실, 교회는 구세주와 달리 사람들을 지도할 수는 없다. 교회도 사람들의 약점을 알고, 군중을 불쌍히 여기며, 죄인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교회는 참된 본모습을 회복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는24) 인간 생활에 고유한 법을 가르치지 않을 수도 없다.
신법 준수의 가능성
20. 하느님의 법을 선포하는 교회의 산아 조절에 관한 교리는 틀림없이 많은 사람에게 지키기 어렵고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고상하고 유익한 온갖 선이 그렇듯이, 이 법도 개인과 가정과 사회의 굳은 결심과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착한 뜻을 비추어주고 강하게 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지 않고서는 이 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러나 깊이 관찰하는 사람들은 이런 노력이 인간의 품위를 높여주고 인간 사회에 많은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자제(自制)
21. 산아 조절의 정당한 방법은 무엇보다 먼저 생명과 가정의 참된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할 것을 부부에게 요구한다. 또한 자신과 자신의 본능을 완전히 지배하는 데에 익숙하기를 요구한다. 지성과 자유 의지의 힘으로 본능을 지배하는 데에는 부부 생활에 고유한 사랑의 표현도 바른 질서에 알맞게 하려는 수덕이 필요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일정한 기간 동안 절제를 지키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규율은 부부의 정결을 빛내는 것이며, 부부애를 해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부부애를 더욱 높은 인간적 가치로 충만케 해준다. 이런 규율이 비록 항구한 노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러나 그 덕분에 부부의 인격이 풍부히 발전하며 영적 가치로 풍부해진다. 이런 규율은 가정 생활에 안정과 평화의 풍부한 결과를 가져오며 또 다른 종류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런 규율은 또한 배우자끼리의 배려와 존경을 북돋아주고 참된 사랑의 원수인 이기주의를 몰아내며 서로의 책임감을 깊게 한다. 이로써 또한 부모는 자녀 교육에 깊고 효과적인 영향력의 권위를 마련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간의 가치를 올바로 평가하게 되고 영적 내지 정신적 능력의 조화된 발전도 가능케 될 것이다.
정결에 유리한 환경의 조성
22. 이 기회에 나는 인간 사회의 공동선에 대하여 권리와 의무를 가진 사람들과 교육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정결을 닦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 달라고 호소하는 바이다. 즉 건전한 자유가 윤리 질서를 존중함으로써 방종을 이길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므로 소위 현대 홍보 수단을 통하여 감각을 자극하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것과 외설 문학과 추한 영화 같은 것들을 문화 발전과 최상의 정신 가치를 옹호할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이 일치하여 모조리 배격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퇴폐 현상을 예술이나 학문25) 또는 국가가 허용하는 자유를 구실삼아 정당화하려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국가 지도자들에게
23. 국가 지도자들에게 공동선 보호의 중한 책임이 있으므로 나는 미풍양속을 옹호하라고 그들에게 호소하는 바이다. 국민의 미풍양속이 퇴폐해 가는 것을 절대로 버려두지 말고, 국가의 기본 세포인 가정 안에 자연법과 신법에 위배되는 행위를 허용하지 말기를 바란다. 국가 권력은 다른 방법으로 인구 팽창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 해결해야 한다. 즉 도덕률과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입장에서 가족 정책과 국민 교육을 지혜롭게 실천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하여 특히 발전 도상에 있는 국가의 지도자들이 겪고 있는 난관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정당하다고 보았기에 나는 [민족들의 발전]이란 회칙을 반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선임 교황 요한 23세와 함께 다시 강조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인간 품위에 어긋나는 방법이나 수단을 이용해서는 안된다. 그런 방법은 인간과 인간의 생명을 온전히 물질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이용하는 것이다. 개인과 인류 사회 전체의 경제적 내지 사회적 발전이 인간의 참된 가치를 존중하고 촉진할 때에 비로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26) 정책의 빈곤이나 사회 정의감의 결핍이나 재화의 개인 독점이나 또는 국민과 그 모든 후손들의 생활 향상을 위한 노력과 희생의 부족에서 올 수 있는 불행의 책임을 하느님 섭리에 돌리는 것은 하느님께 모욕스러운 일이다.27) 책임 있는 국가 지도자들이 이미 훌륭하게 실천하고 있듯이, 더욱 분발해서 새로운 노력을 다해주기 바란다. 거대한 인류 가족이 상호 협조의 노력을 중단하지 말기 바란다. 여러 국가가 참여하고 있는 큰 국제 기구들이 협조해야 할 분야는 무한히 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자들에게
24. 이제 나는 학자들에게 권고하고 싶다. “전문적 학자들이 공동 연구로써 산아 조절을 도와주는 여러 가지 정당한 조건을 밝혀내기로 노력한다면 결혼 생활과 가정 생활의 행복과 또 양심의 평화를 위해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28) 이미 비오 12세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지만, 가장 바람직한 일은, 의학(醫學)이 자연 주기를 살펴서 정당한 산아 조절의 확실한 기반을 마련해 주는 그것이다.29) 이렇게 학자들과 특히 가톨릭 학자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생명 전달에 관한 하느님의 법과 진정한 부부애를 보장하는 하느님의 법 사이에는 참된 모순이 있을 수 없다”30)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노력해 주기 바란다.
그리스도 신자 부부들에게
25. 이제 나는 특별히 우리 자녀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께서 혼인 생활로 당신을 섬기도록 불러주신 자녀들에게 말하는 바이다. 교회는 신법의 불가침적 조건을 가르침으로써 구원을 전하고 성사를 통한 은총의 길을 열어준다. 이로써 사람은 새로이 창조되어 사랑과 진정한 자유로 창조주와 구세주의 계획에 순응하며, 그리스도의 멍에가 가벼움을 발견하게 된다.31)
그러므로 신자 부부는 주님의 목소리를 순히 듣고 성세 때에 그리스도교적 생활에로 불린 성소가 혼인성사 때에 더욱 명백해지고 더욱 확고해졌음을 알아야 한다. 자기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고유의 성소를 완전히 따르며, 고유한 방법으로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부부는 혼인성사로 견고케 되는 것이니, 말하자면 축성되는 것이다.32) 주께서 이런 임무를 부부들에게 맡기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 법의 신성성과 감미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의 법은 부부의 협력과 함께 부부애를 인간 생명의 창조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밀접히 결합시킨다.
그러나 여기서 신자 부부들이 결혼 생활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심각한 난관을 숨길 생각은 도무지 없다. 누구에게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하기”33)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명에로 가리라는 희망은 그들의 여정을 밝게 비추어줄 것이므로,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정신을 차려 바르고 경건하게 살며,34) 이 세상 형태는 사라지고 말 것임을35) 잘 알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신앙과 희망에서 힘을 얻어 맡겨진 일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겠다. 이런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니,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다.”36) 항구한 기도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특히 성체의 마를 줄 모르는 샘에서 은총과 사랑을 길어 마셔야 하겠다. 만일에도 아직 죄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했다면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겸손되이 또 항구히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당신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혼인 생활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바오로께서는 말씀하셨다. “남편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듯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이와 같이 남편된 사람들도 자기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몸을 기르고 보살펴줍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기르시고 보살펴주십니다. 참으로 심오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서 남편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37)
가정 사도직
26. 하느님의 법을 충실히 지키는 데에서 거둘 수 있는 결실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은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의 경험을 나누어주려는 원의라 하겠다. 이로써 광범한 평신도 사도직 분야에 또 하나의 새로운 사도직 형태인 “상호 봉사”의 형태가 추가된다. 즉 부부는 다른 부부를 위해서 사도가 되고 인도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여러 가지 사도직 형태 중에서 가장 현시대에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38)
의사들과 의료인들에게
27. 의사들과 의료인들 가운데서도 그 직무 수행에 있어서 인간적 관심을 초월하여 그리스도교적 사명이 요구하는 것을 더욱 존중하는 이들에게 극도의 존경을 표시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기회 있는 대로 신앙과 바른 이성이 요구하는 해결책을 발견하도록 계속 노력하며 관계자들 모임에서도 이런 해결책을 확신하고 존중하도록 강조하기 바란다.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 어려운 분야의 필요한 지식을 마련하여, 부부들이 찾아와서 정당하게 요구할 때에 그들에게 의견을 주고 정당한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을 직책상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사제들에게
28. 성무를 수행하며 개인과 가정들의 자문에 응하고 영적 지도를 맡은, 친애하는 사제들에게 나는 신뢰를 가지고 말하는 바이다. 특히 윤리신학을 가르치는 사제들의 중한 임무는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온전히 또 명백히 설명하는 그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신학 교수들이 그 직무 수행에 있어서 먼저 교회의 교도권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바쳐야 할 성실한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겠다.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기보다는 교회의 사목자들이 진리를 밝히기 위하여 특별히 허락받은 성령의 빛 때문에39)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양심의 평화와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위해서도 신앙 교리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도덕률에 관해서도 교회의 교도권에 순종하고, 같은 말을 하는 것이 가장 중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사제들에게 호소하며 위대한 사도 바오로의 걱정스러운 말씀을 되풀이하는 바이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굳게 단합하십시오.”40)
사목 지침
29. 그러나 영혼들에게 대한 사랑의 최고 형태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을 절대로 손상시키지 말 것이다. 오히려 주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처럼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세상을 심판하러 오지 않으시고 오직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주께서는41) 죄에 대하여 몹시 엄격하셨지만 죄인들에 대해서는 인내와 자비를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어려움 중에 빠져 있는 부부들이 사제의 말과 사제의 가슴속에서 우리 구세주의 사랑과 그 목소리의 영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다.
교도권이 바른 진리를 가르칠 때에 도와주시는 성령께서 또한 신자들의 마음을 비추시며 그들을 부르시어 동의하도록 움직이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사제들도 굳은 신뢰로써 말하기 바란다. 부부들에게는 기도의 필요성을 가르쳐주고 자주 영성체와 고해성사에 나오도록 권고하며 자기들의 약점 때문에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가르치기 바란다.
주교들에게
30. 이제 이 회칙을 끝마치면서 하느님 백성의 영적 선익을 돌보는 일에 있어서 나와 밀접히 결합되어 있는 존경하는 형제 주교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몇 마디 하고자 한다. 주교들은 성무의 협력자인 자기 사제들과 신자들에 앞서서 온갖 노력을 다하여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혼인 생활을 안전하고 거룩하게 보호함으로써 혼인 생활이 인간적 내지 그리스도교적 충만함에 도달하도록 힘쓰라고 긴급히 요청하는 바이다. 이것이 이 시대에 있어서 주교들의 가장 긴급한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바란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이 임무는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인간 활동 분야에 걸친 사목 수행의 일정한 질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분야가 동시에 더욱 발전해야만 가정 안에서의 부모의 생활과 자녀들의 생활이 견딜 만하게 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쉬워지고 더 즐거워지겠기 때문이다. 그래야 비로소 인류 사회의 공동 생활도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거룩히 실천하며 형제적 사랑으로 더욱 풍부해지고 참된 평화로 더욱 안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호소
31.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자녀들 그리고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함께 실천하려는 교육과 발전과 사랑의 노력은 참으로 중대한 것이며 확고한 교회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베드로의 후계자가 가톨릭 주교직에 있는 그 형제들과 더불어 지켜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이 사업은 세계와 교회에 다 같이 유익한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힘을 다하여 동경하고 있는 참된 행복에 도달하려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자연에 박아주신 법을 지혜롭게 사랑으로 준수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 중대한 노력과 이 노력을 계속하는 모든 이들과 특히 부부들에게 천상 은총을 풍부히 내려주시기를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빌며 그 증거로써 나의 사도적 축복을 기꺼이 보내는 바이다.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교황 재위 제6년, 1968년 7월 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에
교황 바오로 6세.
- 비오 9세, 회칙 Qui pluribus: Pii IX Acta 1, 9-10면; 비오 10세, 회칙 Singulari quadam(1912.9.24.): AAS 4(1912), 658면; 비오 11세, 회칙 Casti connubii(1930.12.31.): AAS 22(1930), 579-581면; 비오 12세, 전세계 가톨릭 주교들에게 한 훈화 Magnificate Dominum(1954.11.2.): AAS 46(1954), 671-672면; 요한 23세, 회칙 어머니와 교사: AAS 53(1961), 457면 참조.
- 마태 28,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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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비뇨기과의협회 제26차 회의에서 한 훈화: AAS 45(1953), 674-675면; 이탈리아 맹인회와 “cornea” 봉헌자회 지도자들에게 한 훈화: AAS 48(1956), 461-462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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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목 헌장, 51항: AAS 58(1966), 1072면.
- 마태 11,30 참조.
- 사목 헌장, 48항: AAS 58(1966), 1067-1069면; 교회 헌장, 35항: AAS 57(1965), 40-41면 참조.
- 마태 7,14; 히브 12,11.
- 디도 2,12 참조.
- 1고린 7,31 참조.
- 로마 5,5.
- 에페 5,25.28-29.32-33.
- 교회 헌장, 35항과 41항: AAS 57(1965), 40-45면; 사목 헌장, 48-49항: AAS 58(1966), 1067-1070면; 평신도 교령, 11항: AAS 58(1966), 847-849면 참조.
- 교회 헌장, 25항: AAS 57(1965), 29-31면 참조.
- 1고린 1,10.
- 요한 3,17 참조.